
"팀장님, 이 보고서는 금요일까지 무조건 끝낼 수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몰아서 하면 공부 다 할 수 있어."
우리는 매번 다짐합니다. "이번엔 미리미리 해서 여유롭게 끝내야지." 하지만 결과는 늘 똑같습니다. 마감 1시간 전까지 미친 듯이 타자를 치고, 퀄리티는 엉망이고, 눈은 퀭합니다.
우리가 게을러서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뇌의 버그,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이 밝혀낸 이 이론을 통해, 왜 우리의 계획표는 항상 휴지 조각이 되는지 알아봅니다.
1. 장밋빛 미래만 그리는 뇌의 착각
계획 오류란 자신이 어떤 일을 완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실제보다 훨씬 짧게 예측하는 심리적 편향입니다.
카너먼의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들에게 졸업 논문을 쓰는 데 걸릴 시간을 예측하게 했더니 평균 33.9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며칠이 걸리겠느냐?"는 질문에는 48.6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걸린 시간은 평균 55.5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예상한 '최악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린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울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최상의 시나리오(Best-case Scenario)'만을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자료 조사가 한 번에 끝나고, 컴퓨터는 고장 나지 않으며, 갑작스러운 회식도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변수 투성이입니다.
2. 내부 관점 vs 외부 관점
우리가 이 오류에 빠지는 또 다른 이유는 내부 관점(Inside View)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과 나의 의지만을 봅니다. "이번엔 내가 진짜 마음먹었으니까 다를 거야."
하지만 객관적인 예측을 위해서는 외부 관점(Outside View)을 봐야 합니다. 즉, 과거의 데이터입니다. "내가 지난번에 비슷한 보고서를 쓸 때 며칠 걸렸지?" 혹은 "다른 동료들은 보통 얼마나 걸리지?"
과거에 5일 걸렸다면 이번에도 5일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는 내가 딴짓을 해서 그런 거고, 이번엔 집중할 거니까 3일이면 돼"라며 과거의 데이터를 무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합니다.
3. 프로젝트를 쪼개야 시간이 보인다
계획 오류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업무를 잘게 쪼개는 것(Unpacking)입니다.
"홈페이지 개편하기 - 1주일"이라고 뭉뚱그려 잡으면 뇌는 낙관회로를 돌립니다. 하지만 이를 1) 기획안 작성, 2) 디자인 시안 컨펌, 3) 개발 수정, 4) 버그 테스트 등으로 쪼개면 숨어있던 시간들이 보입니다. "아, 디자인 컨펌받는 데만 이틀은 걸리겠구나."
뭉쳐진 덩어리를 풀어서 구체적인 단계별 소요 시간을 더해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3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요약 및 결론
계획 오류는 과제의 완료 시간을 실제보다 낙관적으로 짧게 예측하는 경향입니다. 최상의 시나리오만 가정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과거의 경험(외부 관점)을 기준으로 시간을 산정하고, 업무를 세부 단위로 쪼개어 예측의 정확도를 높여야 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나는 '슈퍼맨'이 아니라 '김 대리'다
# 프로 계획러의 화려한 다이어리
저는 다이어리 꾸미기에 진심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주 일요일 밤이면 형광펜을 꺼내 들고 다음 주 계획을 짰습니다. 제 계획표는 숨 막힐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 09:00~11:00 시장 조사 보고서 완료
- 11:00~12:00 팀 회의 자료 준비
- 13:00~15:00 거래처 미팅 및 이동
- 15:00~18:00 신규 기획안 초안 작성
보시면 아시겠지만, 빈틈이 없습니다. 저는 이 계획표를 보며 뿌듯해했습니다. "이야, 이대로만 하면 나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이다. 칼퇴하고 운동도 가야지."
# 현실의 나는 배가 아프고, 프린터는 고장 난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 되면 제 완벽한 계획은 10시도 안 돼서 박살 났습니다. 시장 조사를 하려고 인터넷을 켰는데, 갑자기 회사 인터넷이 먹통이 됩니다. 30분을 날립니다. 겨우 복구해서 보고서를 쓰려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또 20분이 지납니다. 자리에 앉으니 부장님이 부릅니다. "김 대리, 잠깐 나 좀 봐." 잠깐이라더니 1시간 동안 훈화를 하십니다.
자리에 돌아오니 11시 반입니다. 제 계획대로라면 이미 보고서와 회의 자료가 끝났어야 하는데, 아직 보고서 첫 줄도 못 썼습니다. 그때부터 멘붕이 옵니다. 오후 일정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밀리고, 결국 저는 그날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김밥을 씹으며 야근을 했습니다. 다이어리에는 X표만 가득했죠.
# 계획표 속의 인물은 허구다
저는 오랫동안 제가 의지가 약해서 실패한다고 자책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설정값'이었습니다.
제 계획표 속에 사는 '나'는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10분 만에 먹고, 상사가 불러도 안 가고, 집중력이 4시간 내내 유지되는 '슈퍼맨'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밥 먹으면 졸리고,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 오면 받아야 하고, 엑셀 함수가 기억 안 나서 10분 동안 검색해야 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계획을 짤 때, 자신을 로봇으로 설정합니다. 변수(화장실, 전화, 동료의 잡담, 컴퓨터 오류)를 전혀 고려하지 않죠. 그러니 실패하는 게 당연합니다. 계획 오류는 '희망 사항'을 '예정 사항'으로 착각하는 데서 옵니다.
# x1.5의 법칙과 버퍼(Buffer)
수많은 실패 끝에 저는 '나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저만의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x1.5의 법칙'입니다.
제가 직감적으로 "이건 2시간이면 해"라고 생각했다면, 거기에 1.5를 곱해서 '3시간'으로 잡습니다. "이건 3일이면 끝나"라고 생각했다면, '4.5일' 즉 5일로 잡습니다.
처음엔 "너무 늘어지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해보니 놀랍게도 그 시간이 딱 맞았습니다. 늘어지는 게 아니라, 그 0.5만큼의 시간은 반드시 일어나는 돌발 변수(프린터 고장, 급한 전화, 컨디션 난조)를 처리하는 데 쓰이더군요.
그리고 계획표 사이사이에 반드시 '버퍼(Buffer, 완충지대)'를 둡니다. 하루에 1시간 정도는 '아무 계획 없는 시간'으로 비워둡니다. 이 시간은 밀린 일을 처리하거나 멍 때리는 용도입니다.
여러분의 다이어리를 펴보세요. 혹시 숨 쉴 틈 없이 빽빽한가요? 그건 계획표가 아니라 여러분을 옥죄는 감옥입니다. 여백을 만드세요. 그리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으세요. 당신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여유를 계획하는 것, 그것이 계획을 지키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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