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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행동 이야기

1년 내내 소처럼 일했는데, 왜 고과는 엉망일까? (feat. 가용성 휴리스틱)

by curiousways 2026. 1. 27.

성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김 대리, 자네는 꾸준하긴 한데 임팩트가 없어." "박 과장은 지난달에 그 큰 사고 수습한 게 컸지. 역시 일 잘해."

연말 인사 평가 시즌이 되면 사무실 곳곳에서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지각 한 번 안 하고 묵묵히 일했던 김 대리는 B등급을 받고, 맨날 탕비실에서 놀다가 연말에 프로젝트 하나 터뜨린 박 과장은 S등급을 받습니다.

"이 회사는 공정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이는 상사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뇌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 때문입니다. 바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기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입니다. 오늘은 당신의 성실함이 배신당하는 이유와, 상사의 뇌를 해킹하는 법을 알아봅니다.

1. 뇌는 '데이터'가 아니라 '느낌'을 믿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가용성 휴리스틱은, 인간이 확률이나 통계(Data)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사례(Availability)의 용이성에 의존한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에게 "비행기 사고와 자동차 사고 중 무엇이 더 위험할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비행기라고 답합니다. 실제 확률은 자동차 사고가 훨씬 높지만, 뉴스에서 본 비행기 사고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고 기억에 잘 남기(가용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인사 평가도 똑같습니다. 상사는 1월부터 12월까지 당신의 업무 데이터를 엑셀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평가 시즌인 12월에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김 대리가... 뭘 했더라?" 이때 뇌에 '쉽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면, 당신의 1년 치 성과는 증발하는 것입니다.

2. 최신 효과: 11월의 실수가 1월의 성과를 덮는다

가용성 휴리스틱의 가장 무서운 파트너는 최신 효과(Recency Effect)입니다. 우리 뇌는 오래된 기억보다 최근의 기억을 더 생생하게 인출합니다.

당신이 1월부터 10월까지 매달 매출 120%를 달성했어도, 11월에 치명적인 실수 한 번을 했다면? 상사의 머릿속 검색창에는 '11월 실수'가 가장 상단에 뜹니다. 반대로 1년 내내 죽 쑤던 동료가 12월에 야근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상사는 "쟤가 요즘 참 열심히 하네"라며 후한 점수를 줍니다.

꾸준함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꾸준함은 '배경화면'과 같아서 뇌가 정보를 처리할 때 무시해 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이죠.

3.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이 억울한 뇌의 오류를 역이용해야 합니다. 상사가 기억해 주길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내 성과를 상사의 뇌세포에 강제로 각인시켜야 합니다.

핵심은 기록과 주입입니다. 매주, 매월 자신이 한 일을 구체적인 수치로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거나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평가 시즌 직전)에 임팩트 있는 한 방을 터뜨려야 합니다.

"알아서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입니다. 당신의 1년을 대변할 수 있는 '생생한 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 그것이 가용성 휴리스틱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약 및 결론

가용성 휴리스틱은 통계적 사실보다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기억에 의존해 판단하는 심리적 오류입니다. 인사 평가 시 상사는 최근의 사건이나 강렬한 기억(최신 효과)에 의존하므로, 꾸준하기만 한 직원은 저평가될 위험이 큽니다. 자신의 성과를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고, 평가 시점에 맞춰 임팩트를 남기는 전략적인 자기 어필이 필요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소방관이 되지 말고 방화범을 잡으세요 (근데 티 나게)

# 나는야 사무실의 투명 인간

신입 시절, 저는 '성실함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책상을 닦고, 시키지 않은 잡일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제 전략은 '침묵의 헌신'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묵묵히 고생하면 언젠가 진심이 통하겠지."

그런데 3년 차 때 충격적인 일을 겪었습니다. 제 동기 중에 소위 '뺀질이'가 한 명 있었거든요. 평소에는 업무 시간에 주식 창이나 보고, 회의 시간에는 졸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그 친구 몫까지 펑크 난 걸 메워주느라 야근을 밥 먹듯이 했죠.

그런데 연말에 대형 사고가 터졌습니다. 서버가 다운되고 고객 클레임이 폭주하는 비상사태였습니다. 저는 뒤에서 묵묵히 로그를 분석하고 데이터를 복구하느라 3일 밤을 새웠습니다. 반면 그 '뺀질이' 동기는 고객센터에 가서 전화를 몇 통 받고, 임원들에게 상황 보고 메일을 뿌렸습니다. "현재 상황이 심각하지만, 제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라면서요.

#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 아니, 난세를 이용한다

상황이 종료된 후, 영웅이 된 건 제가 아니라 그 친구였습니다. 임원들은 "위기 상황에서 박 대리의 대처가 빛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요? "김 대리는 뭐 했어? 안 보이던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억울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묵묵히 사고를 수습하는 동안(예방과 복구), 그 친구는 눈에 보이는 곳에서 불을 끄는 척(소방관 연기)을 한 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회사는 평화로울 때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전쟁 났을 때 칼 들고 설치는 사람을 기억하는구나. 평소에 사고 안 나게 예방하는 사람(Availability 낮음)보다, 사고 났을 때 시끄럽게 수습하는 사람(Availability 높음)이 고과를 잘 받는 더러운 세상이구나.

# 기록하지 않은 노동은 봉사활동이다

그날 이후 저는 '투명 인간'을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기록광'이 되기로 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퇴근 전, 저는 팀장님께 [주간 업무 요약]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번 주에 제가 막은 잠재적 사고가 3건이고, 처리한 데이터가 10,000건입니다."

처음엔 팀장님이 "뭘 이런 걸 매주 보내?"라고 했지만, 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말 평가 시즌이 다가오면, 11월부터는 일부러 눈에 띄는 프로젝트를 자원했습니다. 야근할 때는 일부러 팀장님이 퇴근할 때 질문을 하러 갔습니다. "팀장님, 이 부분 고민 중인데 조언 부탁드립니다." (나 지금 야근한다는 걸 눈도장 찍는 거죠.)

결과는요? S등급이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줄었는데, 고과는 올랐습니다.

여러분, 1년 내내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일하셨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회사 입장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착한 어린이 콤플렉스를 버리세요. 자신의 고생을 마케팅하세요. "제가 이걸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건, 내 땀방울의 가치를 남들이 몰라주게 방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엑셀을 켜세요. 그리고 올해 당신이 해결한 문제들을 적으세요. 그리고 상사의 뇌 속에 그 데이터를 쑤셔 넣으세요. 기억되지 않는 성과는, 존재하지 않는 성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