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워크숍 어디로 갈까?" "부장님이 등산 좋아하시니까 관악산 어떨까요?" "오, 건강하고 좋네. 다들 찬성이지?" "네! 좋아요!"
주말 아침, 전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릅니다. 속으로는 모두가 욕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등산을 제안했던 김 대리도, 좋다고 했던 박 과장도, 그리고 맨 앞에서 걷는 부장님조차도 사실은 집에서 쉬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구성원 전원이 원하지 않았는데, 결정은 만장일치로 내려졌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경영학자 제리 하비는 이를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등보다 더 무서운 '잘못된 합의'의 함정을 파헤쳐 봅니다.
1. 텍사스의 더운 여름날, 비극은 시작되었다
제리 하비 교수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이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텍사스에 모인 가족들이 지루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장인어른이 제안했습니다. "애빌린(Abilene)에 가서 밥이나 먹고 올까?"
애빌린은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고, 에어컨도 없는 차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하비는 가기 싫었지만 장인어른을 위해 "좋네요"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당신들이 좋다면 가요"라고 했고, 장모님도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흙먼지를 마시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사실 난 가기 싫었어." 그러자 줄줄이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당신들이 원해서 억지로 간 거야." "나도 그냥 집에서 쉬고 싶었어."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서로가 원한다고 착각하여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2. 갈등이 무서워 동의하는 척하는 사람들
애빌린의 역설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소외에 대한 공포(Action Anxiety)입니다. "나만 반대하면 분위기 깨겠지?", "별난 사람 취급받겠지?"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다수의 의견(이라고 추측되는 것)에 동조해 버립니다.
이를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고도 합니다. 남들은 다 좋아서 동의하는 줄 알고, 나만 속마음을 감추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사실 옆 사람도 똑같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조직 문화가 수직적이고 경직될수록 이 현상은 심해집니다. 상사가 "짜장면 먹을까?"라고 묻는 순간, 짬뽕을 먹고 싶은 팀원들의 뇌는 "상사가 짜장면을 원한다"라고 해석하고 "저도 짜장면이요!"를 외칩니다. 이것은 화합이 아니라, 집단 자살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3. "나는 사실 반대해"라고 말할 용기
이 역설을 깨기 위해서는 누군가 총대를 메고 침묵을 깨야 합니다. "잠깐만요, 우리 진짜로 거기를 가고 싶은 건가요?"라는 질문 하나가 '가짜 합의'의 환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리더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리더는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하지 말고, "나는 등산도 좋지만, 영화도 좋아. 너희들 생각은 어때? 솔직하게 말해도 불이익은 없어"라고 심리적 안전감을 줘야 합니다.
진정한 소통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진짜 합의(Real Agreement)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요약 및 결론
애빌린의 역설은 구성원 모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직의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현상입니다. 소외당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이 원한다고 착각하여 동의하는 척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솔직한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과, 가짜 합의를 의심하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착한 사람들이 조직을 망친다
# 내가 주도한 최악의 워크숍
막내 사원 시절, 저는 팀 워크숍 장소를 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팀장님은 주말마다 산에 다니는 등산 마니아였습니다. 저는 점수를 따고 싶었습니다.
"팀장님 취향을 저격해야지. 그래야 팀장님 기분이 좋아지고, 팀 분위기도 살겠지?" 저는 회의 시간에 비장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요즘 날씨도 좋은데 청계산 등산 어떨까요? 끝나고 백숙도 먹고요!"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곧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 김 사원이 건강을 생각하네? 나는 좋은데 다들 어때?" 그러자 선배들이 하나둘씩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오랜만에 땀 좀 빼죠." "김 사원 센스 있네." 저는 뿌듯했습니다. '역시 난 사회생활을 잘해.'
# 비 내리는 청계산의 침묵
워크숍 당일,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취소될 줄 알았는데, 이미 식당 예약까지 다 해놔서 강행하기로 했습니다. 비옷을 입고 진흙탕 산길을 오르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선배들의 표정은 똥 씹은 표정이었고, 평소 말이 많던 박 과장님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심지어 등산을 좋아한다던 팀장님마저 힘들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팀장님은 최근에 무릎이 안 좋아서 등산을 쉬고 계셨던 겁니다. 팀장님은 제가 야심 차게 준비한 거라 실망시키기 싫어서 억지로 좋다고 하셨던 거고, 선배들은 팀장님이 좋다고 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한 거였죠.
결국 정상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내려와서 눅눅해진 파전을 먹었습니다. 막걸리 잔을 돌리는데 적막만 흘렀습니다. 그날의 워크숍은 '서로를 배려하다가 서로를 증오하게 된' 최악의 하루로 기록되었습니다.
# 우리는 모두 '배려'라는 가면을 쓴 거짓말쟁이였다
그날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조직을 망치는 건 악한 마음이 아니라, 어설픈 배려심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우리는 너무 착합니다. 상대방 기분을 맞추려고,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좋아요(Yes)"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내가 참으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참으면 옆 사람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애빌린의 역설이 무서운 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다들 "너를 위해서 그랬어"라고 말하니까요. 제가 만약 그때 눈치 보지 않고 "솔직히 등산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요즘 핫한 보드게임 하러 가시죠"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선배들이 "와! 김사원 최고!"라며 물개 박수를 쳤을 겁니다. 심지어 무릎 아픈 팀장님도 속으론 고마워했을 겁니다.
# "잠깐만요"를 외칠 용기
그 이후로 저는 회의 시간에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짐짓 딴지를 거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다들 좋다고 하시는데,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단점은 없을까요?" "혹시 부장님 의견이라서 다들 찬성하시는 건 아니죠? (웃음)"
처음엔 건방져 보일까 봐 떨렸지만, 놀랍게도 제가 총대를 메고 질문을 던지면 그제야 사람들이 "사실은 나도 좀 걱정됐어"라며 진짜 속마음을 꺼내놓더군요.
여러분, 착한 사람이 되지 마세요. 대신 솔직한 사람이 되세요. 오늘 점심 메뉴 정할 때, 다들 "아무거나"라고 하거든 용기 내서 말해보세요. "저는 오늘 뜨거운 국물은 진짜 먹기 싫어요." 그 한마디가 당신의 팀을 애빌린의 사막에서 구해낼 구명조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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