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이번 신규 공급업체 재무제표랑 실사 결과 완벽합니다. 계약 진행할까요?" "잠깐만, 오늘 아침 뉴스 못 봤어? 비슷한 업종 회사가 부도났다는 기사 떴잖아.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네? 그 회사는 우리랑 상황이 정말 다른데요..." "아니야, 찜찜해. 일단 보류해."
우리는 의사결정을 내릴 때 모든 데이터를 냉철하게 분석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장 머릿속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강력한 기억 하나에 의존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 본 충격적인 뉴스, 지난달에 겪은 강렬한 경험 등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죠.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제가 뉴스 기사 하나에 겁을 먹고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버렸던 뼈아픈 경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완벽했던 파트너를 내 손으로 밀어내다
1) 6개월 만에 찾아낸 구세주
제가 구매팀 과장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 회사는 핵심 부품을 공급해 줄 새로운 파트너를 찾느라 6개월째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기존 업체는 단가가 너무 비쌌고, 품질도 들쭉날쭉했거든요.
그러다 마침내 A사라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생 업체였지만 기술력이 뛰어나고 단가도 획기적으로 낮았습니다. 저는 직접 공장 실사까지 다녀왔고, 재무팀을 통해 신용 평가도 마쳤습니다. 모든 데이터가 '완벽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뜬 마음으로 최종 계약서 도장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2) 아침 출근길에 본 스마트폰 뉴스
계약 당일 아침이었습니다. 출근 지하철에서 무심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경제면 헤드라인에 자극적인 기사가 떴습니다. [충격! 잘 나가던 중견 부품사 B사, 하루아침에 법정관리 신청... 연쇄 부도 공포 확산]
A사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회사였지만, '부품사', '부도', '법정관리' 같은 단어들이 제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습니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혹시 A사도 이렇게 되는 거 아니야? 신생 업체라는데 갑자기 망하면 그 책임은 다 내가 져야 하잖아.'
3) 데이터보다 공포를 선택한 대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A사 대표님이 계약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은 온통 아침에 본 부도 기사 생각뿐이었습니다. 6개월간 분석한 수백 장의 긍정적인 데이터보다, 방금 본 자극적인 뉴스 기사 하나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결국 저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계약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A사 대표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어떻게 됐을까요? A사는 경쟁사와 계약하여 대박을 터뜨렸고,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여전히 비싼 기존 업체와 거래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낭비했고요. 저는 데이터가 아닌 막연한 공포에 굴복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2. 뇌는 생생한 기억을 사실로 착각한다
1)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위험할까?
사람들은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더 무서워합니다. 통계적으로 자동차 사고 사망 확률이 비행기 사고보다 훨씬 높은데도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동차 사고는 매일 일어나서 뉴스에 잘 안 나오지만, 비행기 사고는 한 번 터지면 전 세계 뉴스에 대서특필되고 끔찍한 영상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는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통계적 빈도)'보다 '얼마나 쉽게 기억에 떠오르는가(회상 용이성)'를 기준으로 사건의 발생 확률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가용성 휴리스틱의 핵심입니다.
2) 최근의 경험이 판단을 지배한다
특히 최근에 겪었거나 감정적으로 강렬했던 경험일수록 '가용성'이 높습니다. 직원 채용 면접을 볼 때, 바로 직전에 들어온 지원자가 너무 엉망이었다면, 그다음에 들어온 평범한 지원자를 실제보다 훨씬 뛰어나게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저번에 이거랑 비슷한 거 했다가 망했잖아"라는 한마디가 객관적인 시장 분석 보고서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과거의 강렬한 실패 기억이 현재의 판단을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3. 요약 및 결론
가용성 휴리스틱은 어떤 사건의 빈도나 확률을 판단할 때, 객관적인 통계 정보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당장 쉽게 떠오르는 구체적인 사례나 최근의 정보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인지 편향입니다.
인간의 뇌는 통계적인 수치보다는 충격적이고 생생한 일화나 뉴스, 개인적인 경험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쉽게 회상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직관적인 느낌이나 공포를 경계하고, 반드시 객관적인 데이터와 통계적 기저율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조직행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박사보다 무서운 이유 (feat. 더닝-크루거 효과) (0) | 2026.02.23 |
|---|---|
| 천재들이 모여서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이유 (feat. 집단사고) (0) | 2026.02.20 |
| 지각한 후배는 게으르고, 내가 지각한 건 차가 막혀서? (feat. 기본적 귀인 오류) (0) | 2026.02.18 |
| 명문대 출신 '엄친아'를 뽑았다가 팀이 박살 난 이유 (feat. 후광 효과) (0) | 2026.02.16 |
| 3억 원을 태우고 나서야 멈춘 엑셀 (feat. 매몰 비용 오류) (0) | 202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