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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행동 이야기

"어차피 말해도 안 바뀌잖아요"라며 입을 닫은 김 대리의 속사정 (feat. 학습된 무기력)

by 호기심의 항구 2026. 2. 27.

"김 대리, 이번 프로젝트 아이디어 좀 없어? 편하게 이야기해 봐." "아... 네, 딱히 없습니다. 팀장님 의견 따르겠습니다." "아니,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입사 때는 눈이 초롱초롱하더니."

우리는 시키는 일만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직원을 보며 '매너리즘에 빠졌다'거나 '열정이 식었다'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반복된 실패와 거절을 경험하면 사람이나 동물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게 되고, 나중에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와도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제가 열정 넘치던 신입 사원을 어떻게 '무기력한 좀비'로 만들었는지 반성하는 이야기입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바깥세상은 밝게 빛나지만, 발목에 묶인 아주 얇은 줄과 작은 돌멩이 하나 때문에 탈출할 수 없다고 믿고 좌절해 앉아 있는 직장인의 모습을 통해 학습된 무기력을 표현

1. 나는 어떻게 열정적인 인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나

1) 혁신을 꿈꾸던 신입 사원 K

제가 과장 진급을 막 했을 때, 우리 팀에 K라는 신입 사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 입사 첫 달부터 비효율적인 엑셀 수기 보고 방식을 지적하며 자동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겠다고 제안했죠. 저는 그때 제 업무가 너무 바빴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가 오류가 나면 책임지기 싫었습니다. "K씨, 의욕은 좋은데 우리는 원래 이렇게 해왔어. 나중에 시간 날 때 다시 보자고. 지금은 시키는 것부터 해." K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알겠다고 했습니다.

2) 두 번째, 세 번째 좌절

몇 달 뒤, K는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경쟁사의 마케팅 사례를 분석해 우리 팀의 약점을 보완할 기획안을 들고 왔습니다. 꽤 괜찮은 내용이었지만, 당시 본부장님이 보수적인 성향이라 결재가 안 날 것이 뻔했습니다. "이거 위에서 안 좋아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하던 거나 잘하자." 저는 기획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책상 구석으로 밀어뒀습니다. 그 이후에도 K는 회의 시간마다 손을 들고 의견을 냈지만, 저는 "그건 예산 때문에 안 돼", "시기가 안 좋아"라는 이유로 매번 묵살했습니다.

3) 코끼리를 묶어둔 밧줄

입사 3년 차가 되었을 때, K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칼같이 퇴근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답답해서 물었습니다. "K 대리, 예전에는 아이디어도 많이 내더니 요즘은 왜 그렇게 조용해?" K는 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어차피 말씀드려도 안 될 거잖아요. 힘만 빠지는데 뭐 하러 합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K가 변한 게 아니라, 제가 K에게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아'라는 무력감을 학습시킨 것이었습니다.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어릴 때 묶여 있던 밧줄의 기억 때문에, 덩치가 커져서도 밧줄을 끊을 생각을 못 하는 것처럼 말이죠.

2. 실패가 반복되면 뇌는 시도를 멈춘다

1) 마틴 셀리그먼의 잔인한 실험

이 이론은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의 강아지 실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강아지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A그룹은 버튼을 누르면 충격을 멈출 수 있었지만, B그룹은 무엇을 해도 충격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두 그룹을 셔틀박스(장애물만 넘으면 전기를 피할 수 있는 상자)에 넣었습니다. A그룹은 금방 장애물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B그룹은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전기 충격을 그대로 견뎠습니다. "내가 뭘 해도 고통은 끝나지 않아"라는 학습된 무기력이 탈출 의지 자체를 꺾어버린 것입니다.

2) 조직을 병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하 직원의 제안을 무조건 반려하거나, 노력해도 보상이 없고, 성과가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직원들은 B그룹의 강아지처럼 변합니다. 이들은 업무 능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통제 불가능성'을 학습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의지를 상실한 것입니다.

3) 작은 성공이 무기력을 치료한다

학습된 무기력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통제 가능성'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제안이라도 즉시 수용되고 실행되는 경험, 즉 작은 성공(Small Wins)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네 말이 맞아. 한번 해보자"라는 리더의 긍정적인 피드백이 밧줄을 끊을 용기를 줍니다.

3. 요약 및 결론

학습된 무기력은 반복적인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부정적 상황을 겪으면서, 스스로 상황을 극복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포기해 버리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개인의 나약한 의지보다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비합리적인 환경과 시스템이 구성원에게 패배감을 학습시키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에게 업무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작은 성취와 성공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여 자신의 행동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효능감을 회복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