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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행동 이야기

"원래 하던 대로 해": 회사가 혁신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이유 (feat. 현상 유지 편향)

by curiousways 2026. 2. 6.

보고서 작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직장인

 

"김 대리, 이 엑셀 양식 너무 불편하지 않아? 좀 바꾸면 좋을 텐데." "에이, 과장님. 이거 10년 동안 선배들이 써오던 거예요. 바꾸면 괜히 윗분들한테 혼란만 줘요. 그냥 하던 대로 하시죠."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압니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면 알 수 없는 저항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비효율적인 구형 시스템을 고수하고, 맛없는 구내식당 메뉴를 불평하면서도 매일 먹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 강력한 관성을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합니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속담 뒤에 숨어, 더 나은 선택을 거부하는 우리 뇌의 게으른 본성을 파헤쳐 봅니다.

1. 변화는 '손실'로 느껴진다

1988년 경제학자 새뮤얼슨과 젝하우저는 이 편향을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선택지를 주었을 때, 기존에 선택되어 있던 옵션(Default)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이유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 성향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바꾸면 '새로운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잘못될 위험(손실)'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뇌는 100만 원을 버는 기쁨보다 100만 원을 잃는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안전한 선택, 즉 현상 유지를 택합니다.

2. 디폴트(Default) 옵션의 무서움

이 편향은 정책이나 마케팅에서 강력하게 이용됩니다. 장기 기증률이 높은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장기 기증 서약서의 기본값(Default)이 '기증 동의'로 되어 있고, 원치 않는 사람만 '거부' 체크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기증률이 낮은 나라는 기본값이 '기증 안 함'으로 되어 있어, 기증하려면 따로 체크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귀찮은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구독 서비스의 자동 갱신을 기본값으로 설정해 둡니다.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해지하지 않는 한, 현상은 유지되고 돈은 계속 빠져나갑니다.

3. 레거시(Legacy)와의 전쟁

조직에서 현상 유지 편향은 '레거시(Legacy, 유산)'라는 이름으로 혁신을 가로막습니다. "우리 회사는 원래 이렇게 해왔어." 이 말은 가장 강력한 혁신 억제제입니다. 비효율적인 결재 라인, 의미 없는 주간 회의, 복잡한 보고 양식 등은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얻습니다.

이를 깨기 위해서는 '제로 베이스(Zero-base)' 사고가 필요합니다. "원래 그랬으니까"가 아니라, "지금 회사를 새로 만든다면 이 방식을 채택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과거의 관행을 낯설게 보는 순간, 비로소 변화의 틈이 보입니다.

요약 및 결론

현상 유지 편향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비합리적인 고집으로, 변화로 인한 손실이나 후회를 피하려는 심리에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된 옵션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마케팅과 정책에 널리 활용됩니다. 조직의 혁신을 위해서는 "원래 하던 대로"라는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제로 베이스에서 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나는 3년 동안 '유령'에게 보고서를 썼다

# 공포의 '주간 업무 보고서' 양식

신입 사원 시절, 저를 가장 괴롭힌 건 매주 금요일 작성하는 '주간 업무 보고서'였습니다. 그 양식은 정말 악몽 같았습니다. 폰트는 굴림체 11포인트 여야 하고, 표 안의 줄 간격은 130%, 각 항목 앞에는 특수기호(■, □, -)를 순서대로 써야 했습니다. 심지어 색상 코드까지 정해져 있었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전주 대비 증감 사유'를 적는 칸이었습니다. 딱히 변한 게 없어도 억지로 말을 지어내서 칸을 채워야 했습니다. 이 보고서 하나 쓰는 데만 꼬박 2시간이 걸렸습니다.

선배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양식 너무 복잡한데 좀 간소화하면 안 될까요?" 선배들은 질겁하며 말했습니다. "야, 큰일 날 소리. 이거 부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양식이야. 토씨 하나 바꾸면 안 돼. 그냥 시키는 대로 해."

# 부사장님의 충격적인 고백

저는 3년 동안 그 양식을 성경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금요일마다 숫자와 씨름하고, 줄 간격을 맞추느라 야근을 했죠. '이게 회사의 규율이고 전통이다'라고 믿으면서요.

그러다 3년 뒤, 회식 자리에서 우연히 부사장님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부사장님이 뜬금없이 말씀하시더군요. "김 대리, 자네 팀은 보고서가 왜 이렇게 복잡해? 읽기가 힘들어 죽겠어."

네...?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부사장님, 이거... 부사장님이 만드신 양식이라고 들어서 저희는..." 부사장님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내가? 아~ 그거? 내가 10년 전에 실무자일 때, 그때 윗분이 깐깐해서 임시로 만들었던 거야. 나는 임원 되고 나서 그 양식 꼴도 보기 싫어서 안 봐. 그냥 핵심만 메일로 보내면 되는데 왜 아직도 그걸 쓰고 있어?"

#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족쇄

그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습니다. 지난 3년, 아니 우리 팀이 10년 동안 쏟아부은 그 수많은 시간과 야근이, 사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유령'을 위한 제사상이었다니. 부사장님은 진작에 잊어버린 그 양식을, 실무자들은 "원래 하던 거니까", "바꾸면 혼날까 봐"라는 이유로 10년 동안 신줏단지 모시듯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다음 날, 저는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보고서 양식을 싹 없앴습니다. 그냥 이메일 본문에 불렛 포인트(Bullet point) 3개로 요약해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보고 시간은 2시간에서 10분으로 줄었고, 부사장님은 "이제야 눈이 편하네"라며 칭찬하셨습니다.

# "원래"라는 말은 없다

여러분, 지금 하고 있는 업무 중에 "이거 왜 하는 거지?"라고 의문이 드는 게 있나요? 선배에게 물어봤을 때 "원래 그런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방금 '썩은 동아줄'을 발견한 겁니다.

그 '원래'라는 건, 사실 10년 전 누군가의 귀차니즘이나 임시 방편이었을 확률이 99%입니다. 겁먹지 말고 바꾸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받을 겁니다. 현상 유지는 안전한 게 아니라, 천천히 도태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