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분기 50억 규모의 신규 공장 설립 건, 이의 없으시죠? 통과." (땅, 땅, 땅!) "자, 다음 안건. 휴게실 자판기 음료 종류를 뭘로 할까요?" "콜라가 낫지 않나요?" "무슨 소리야, 건강 생각해서 헛개수로 해야지!" "단가가 100원 비싸잖아요!"
(1시간 뒤) "결론이 안 나네요. 다음 주에 다시 논의합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어본 황당한 상황입니다. 회사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안건은 프리패스로 통과되는데, 정작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소한 안건을 두고는 피 터지게 싸웁니다.
노스코트 파킨슨은 이를 두고 사소함의 법칙(Law of Triviality), 일명 자전거 거치대 효과(Bike-shedding Effect)라고 불렀습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바보 같은 토론에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그 심리적 배경을 알아봅니다.
1. 원자력 발전소 vs 자전거 거치대
파킨슨은 가상의 위원회 회의를 예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 안건은 1,000만 파운드(약 160억 원)짜리 원자력 발전소 건설입니다. 위원들은 원자로 설계나 핵물리학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어렵죠.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했겠지"라며 2분 만에 승인합니다.
두 번째 안건은 350파운드(약 50만 원)짜리 직원용 자전거 거치대 설치입니다. 자! 이제 모두가 전문가입니다. 자전거 거치대가 뭔지, 페인트 색깔이 뭔지 다들 알거든요. "지붕은 플라스틱이 좋네, 양철이 좋네", "색깔은 갈색이 때가 덜 타네"라며 온갖 훈수를 둡니다. 회의는 1시간을 넘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에는 침묵하지만, 자신이 만만하게 아는 사소한 문제에는 반드시 한마디를 보태고 싶어 합니다.
2. "나도 기여했다"는 도장을 찍고 싶은 욕망
이 현상이 벌어지는 진짜 이유는 구성원들의 '인정 욕구' 때문입니다. 회의에 참석했는데 한마디도 안 하고 있으면 "저 사람은 왜 앉아있지? 밥값 못 하네"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불안합니다.
그런데 원자력 발전소 안건에는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무식함이 탄로 날까 봐 입을 다뭅니다. 이때 자전거 거치대 안건이 등장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달려듭니다. "제 생각엔 파란색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사실 "색깔"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나도 여기 있어요! 나도 회의에 기여하고 있다고요!"라는 존재 증명입니다. 가장 쉬운 주제를 물고 늘어짐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슬픈 몸부림입니다.
3. 회의의 밀도를 높이는 법
이 비효율을 막으려면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사소한 안건은 회의 테이블에 올리지 말고 실무자에게 전권을 위임해야 합니다. "자판기 음료는 총무팀 김 대리가 알아서 결정하세요."
그리고 중요한 안건을 다룰 때는 "침묵은 동의가 아닙니다. 모르면 질문하세요"라고 분위기를 깔아줘야 합니다. 쉬운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디테일하다'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100억짜리 구멍을 못 보고 100원짜리 구멍을 막느라 밤을 새우는 것, 그것이 조직을 망치는 가장 성실한 태만입니다.
요약 및 결론
사소함의 법칙(자전거 거치대 효과)은 조직이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보다 사소하고 쉬운 문제에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을 쏟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안건에는 침묵하여 무지를 감추고, 쉬운 안건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어 자신의 기여도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사소한 결정은 과감히 위임하고, 중요한 문제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나는 '폰트 깎는 노인'이었다
# 전략을 모르는 자, 껍데기에 집착하리라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대대적인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시작된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10년, 우리 회사는 AI 기반의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거창한 비전이 선포되었죠.
TF팀에 합류한 저는 사실 두려웠습니다. 저는 'AI'의 'A'자도 몰랐거든요. 기술적인 용어가 오가는 전략 회의 시간마다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알고리즘 최적화가 어쩌고...", "데이터 마이닝이 저쩌고..." 사람들이 토론할 때 저는 고개만 끄덕이며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제발 나한테 질문하지 마라. 들키면 끝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평가 때 무임승차라고 찍힐 텐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 2시간 동안 로고 색깔만 가지고 싸운 이유
그러다 디자인 시안 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온 겁니다. 디자인은 기술 몰라도 눈만 있으면 볼 수 있으니까요. 스크린에 새로운 로고 시안이 떴습니다. 심플한 파란색 로고였습니다. 저는 비장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팀장님, 저 파란색... 너무 차가워 보이지 않나요? 우리 회사는 '따뜻한 기술'을 지향하잖아요. 약간 웜톤이 섞인 코발트블루로 가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폰트의 자간이 너무 넓어서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자간을 -5 정도 줄이는 게..."
저는 무려 20분 동안 색감과 자간, 로고의 곡선 각도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습니다. 다른 팀원들이 지쳐서 "대충 하시죠"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제가 이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아는 척' 할 수 있는 분야였으니까요. 결국 제 고집대로 로고 색을 미세하게 수정하는 데 2시간을 썼습니다. 회의실을 나오며 저는 뿌듯해했습니다. "후, 오늘도 내가 한 건 했다. 디테일을 잡았어."
# 자전거 거치대에 페인트칠 하느라 원자로가 터지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우리는 로고 색깔(자전거 거치대)에 집착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했던 '서비스의 타겟 고객 설정(원자로)'에 대한 논의를 건너뛰었습니다. 예쁜 로고를 달고 출시된 서비스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만든 건지 모르겠다"는 혹평을 들으며 6개월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서비스가 망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했던 짓은 '디테일 챙기기'가 아니라 '도피'였습니다. 진짜 중요한 본질(기술, 전략)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기 싫고, 남들에게 일하는 티는 내고 싶어서 만만한 껍데기만 붙들고 늘어졌던 겁니다.
#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진짜 기여다
그때의 저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등짝을 한 대 때리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야, 폰트 쪼가리 붙들고 있지 말고, 모르면 제발 물어봐! AI가 뭔지, 고객이 누구인지 공부를 하라고!"
여러분, 혹시 지금 회의실에서 "이 배너 위치를 1픽셀 옮길까요, 말까요?" 같은 주제로 30분째 토론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멈추세요. 그건 일이 아닙니다. 불안함의 표출일 뿐입니다.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은 쉬운 문제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침묵하는 어렵고 불편한 문제에 대해 "잠깐만요, 저는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갑니다"라고 손을 드는 사람입니다. 자전거 거치대는 대충 칠하고, 원자로 설계도를 봅시다.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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