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 연봉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직 면접이나 연봉 계약 시즌, 인사 담당자의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작아집니다. 너무 높게 부르면 채용이 취소될까 봐 겁나고, 너무 낮게 부르면 손해 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사 내규에 따르겠습니다" 혹은 "먼저 제안 주시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패를 먼저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협상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침묵하는 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니엘 카너먼의 앵커링 효과를 통해, 왜 연봉은 먼저 부르는 게 무조건 이득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닻을 내리는 순간, 가격은 결정된다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 닻 내림 효과)란 배가 닻을 내리면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수 있듯이, 처음에 제시된 정보(숫자)가 기준점이 되어 이후의 판단을 왜곡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티버스키와 카너먼의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피험자들에게 행운의 바퀴를 돌려 무작위 숫자를 보여준 뒤, "유엔에 가입한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은 몇 %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바퀴에서 높은 숫자를 본 사람들은 정답을 높게 추정했고, 낮은 숫자를 본 사람들은 낮게 추정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숫자조차 뇌의 기준점(Anchor)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연봉 협상도 똑같습니다. 누군가 먼저 숫자를 던지는 순간, 그 숫자가 테이블의 닻이 됩니다. 그 이후의 모든 협상은 그 숫자를 기준으로 플러스마이너스 얼마를 조정하는 싸움이 됩니다.
2. 왜 먼저 부르는 사람이 이기는가
많은 지원자가 "회사가 먼저 제시하게 하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위험한 도박입니다. 만약 회사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낮은 금액(Low Anchor)을 먼저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이 6,000만 원을 생각했는데 회사가 5,000만 원을 먼저 제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기준점은 5,000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어필해도 협상은 5,000에서 조금 더 올리는 수준에 그칠 확률이 높습니다. 6,000으로 끌어올리려면 엄청난 논리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반대로 당신이 먼저 6,500만 원을 질렀다면(High Anchor) 어떨까요? 회사는 "너무 높다"고 난색을 보이겠지만, 이미 뇌의 기준점은 6,500에 찍혔습니다. 깎고 깎아서 6,000에 합의하더라도 회사 입장에서는 "500이나 깎았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당신은 원래 원하던 6,000을 챙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제공격의 힘입니다.
3. 그냥 지르지 말고 '구간'으로 던져라
그렇다면 무조건 높은 숫자를 부르는 게 능사일까요? 자칫하면 현실 감각 없는 사람으로 찍힐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레인지 전략(Range Strategy)입니다.
심리학자 볼츠와 웡의 연구에 따르면, 단일 숫자보다 구간(Range)을 제시할 때 협상 성공률이 더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6,000만 원을 원합니다"라고 하는 대신, "제 직무 경험과 시장 가치를 고려했을 때 6,000만 원에서 6,500만 원 사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전략이 영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신이 원하는 금액(6,000)을 하한선(Floor)으로 설정하여 그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방어막을 칩니다. 둘째, 유연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에게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안도감을 줍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은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느끼면서도, 당신이 쳐놓은 높은 닻(Anchor)에 걸려들게 됩니다.
요약 및 결론
협상에서 처음 제시된 숫자는 강력한 기준점(Anchor)이 되어 결과를 좌우합니다. 회사가 낮은 기준점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희망 연봉을 제시하여 판을 주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단일 숫자보다는 내가 원하는 금액을 하한선으로 하는 구간(Range)을 제시하는 것이 설득력을 높입니다.
📌 Curiosity's Insight: 당신의 몸값은 당신이 정하는 것이다
겸손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속물처럼 보일까 봐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회사와 당신은 비즈니스 파트너입니다.
연봉 협상은 단순히 돈을 더 달라고 조르는 자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치를 시장 가격에 맞게 책정하는 비즈니스 미팅입니다. 당신이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침묵하는데, 회사가 알아서 높게 쳐줄 리 만무합니다.
두려워 말고 먼저 닻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그 근거를 대십시오. 당신이 던진 그 숫자가, 회사가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얼마면 되겠니?"에서 "이 정도 줄 만한 사람인가?"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 긴장감 속에서 당신의 진짜 가치가 증명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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