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정치질 같은 거 못해요. 그냥 제 할 일만 열심히 할 겁니다." "김 부장은 실력도 없으면서 윗선에 줄만 잘 서서 승진했어."
직장인들 사이에서 사내 정치라는 단어는 기피 대상 1호입니다. 아부, 줄 서기, 뒷담화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실무형 인재들이 귀를 닫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일에 몰두합니다. "실력이 있으면 언젠가 알아주겠지"라는 믿음 하나로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직심리학은 그 믿음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조직은 진공 상태의 실험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프렌치와 레이븐(French & Raven)의 권력 이론을 통해, 왜 일만 잘하는 사람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지 냉정한 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1. 실력은 권력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실력(업무 능력)이 곧 권력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프렌치와 레이븐은 조직 내 권력의 원천을 5가지로 정의했습니다.
- 보상적 권력: 연봉이나 승진을 줄 수 있는 힘
- 강압적 권력: 처벌이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힘
- 합법적 권력: 직책이나 직위에서 나오는 힘
- 전문적 권력: 업무 지식이나 기술에서 나오는 힘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실력)
- 준거적 권력: 인간적인 매력이나 카리스마로 인해 타인이 따르게 만드는 힘
일만 열심히 하는 당신이 가진 것은 4번, 전문적 권력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자원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윗사람의 지지(보상/강압적 권력의 대리 행사)와 동료들의 호감(준거적 권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실력만 믿고 나머지를 등한시하는 것은, 총알은 있는데 총이 없는 군인과 같습니다.
2. 정치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원을 얻는 기술이다
사내 정치(Office Politics)의 학문적 정의는 조직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활동입니다. 이것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이 우리 팀에 꼭 필요한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내용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예산 담당 상무님이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모릅니다. 이때 "알아서 통과시켜 주겠지"라고 기다리는 것은 직무 유기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상무님을 마주쳤을 때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넌지시 어필하거나(영향력 행사), 상무님이 신뢰하는 옆 팀 부장님을 내 편으로 만들어 설득하게 만드는 것(네트워킹). 이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이 과정 없이는 아무리 좋은 기획안도 휴지 조각이 됩니다. 즉, 건전한 사내 정치는 내 업무를 성공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윤활유이자 생존 기술입니다.
3. 침묵하는 실력자는 호구와 구분되지 않는다
가장 뼈아픈 현실은, 정치를 거부하고 숨어서 일만 하는 사람은 조직에서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는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주 보고 마주칠수록 호감이 생기고 신뢰가 쌓인다는 이론입니다.
맨날 야근하며 묵묵히 일하지만 회식은 다 빠지고 상사와의 티타임도 피하는 A 과장, 그리고 칼퇴근하지만 수시로 상사에게 업무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안부를 묻는 B 대리. 연말 평가 때 상사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슬프게도 조직은 결과물만으로 평가받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Key person)에게 알리는 자기 PR도 업무의 일부입니다. 알리지 않은 성과는 없는 성과와 같습니다. 당신이 침묵하는 동안, 당신의 공로는 목소리 큰 누군가가 가로채 갈지도 모릅니다.
요약 및 결론
조직 내 권력은 실력(전문성) 외에도 인간관계와 영향력(정치력)에서 나옵니다. 사내 정치는 비리가 아니라, 내 업무를 관철시키고 자원을 확보하는 정당한 설득의 기술입니다. 실력만 믿고 소통을 단절하면, 당신의 성과는 묻히고 조직 내 영향력은 사라집니다.
📌 Curiosity's Insight: 아부가 아니라 '매니징 업'을 하라
아직도 정치가 거부감 든다면, 단어를 바꿔봅시다. 정치가 아니라 매니징 업(Managing Up, 상사 관리)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아부는 없는 말을 지어내어 상대의 환심을 사는 비굴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매니징 업은 상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내가 돕는 전략적 행동입니다. 상사가 승진하고 싶어 한다면 그 실적을 만들어주고, 상사가 안정을 원한다면 리스크를 미리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상사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겁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기 위해 상사라는 가장 강력한 리소스를 활용하는 스마트한 업무 능력입니다. 2025년, 일만 잘하는 직원이 아니라 일을 되게 만드는 직원이 되십시오. 그 시작은 모니터 뒤에서 나와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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