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다들 자유롭게 의견 좀 내봐요." (정적) "김 대리, 자네 생각은 어때?" "아, 네... 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회의실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복도나 휴게실에서는 그렇게 말을 잘하던 사람들이 회의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뭅니다. 리더는 "우리 팀원들은 주관이 없어"라고 답답해하고, 팀원들은 "말해봤자 소용없어"라고 체념합니다.
이 숨 막히는 침묵은 개인의 성격 탓일까요? 조직심리학은 이것이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잘못된 생존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어빙 제니스(Irving Janis)의 집단사고 이론을 통해 회의실이 조용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헤쳐 봅니다.
1. 만장일치의 환상, 집단사고의 함정
회의실이 조용한 첫 번째 이유는 집단사고(Groupthink) 때문입니다. 어빙 제니스는 응집력이 높은 집단일수록 갈등을 피하고 만장일치를 이루려는 압력을 강하게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예스(Yes)를 외치는 분위기에서 혼자 아니요(No)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혹시라도 내 의견이 팀의 화합을 깰까 봐, 혹은 리더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스스로 검열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만장일치의 환상이 만들어집니다. 실제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니 겉으로는 모두가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챌린저호 폭발 사고나 피그만 침공 사건 같은 역사적인 실패들은 무식한 사람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2.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는 버스, 애빌린의 역설
집단사고가 낳은 웃지 못할 현상이 바로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입니다. 제리 하비 교수가 소개한 이 일화는, 한 가족이 더운 날씨에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애빌린이라는 도시로 힘겹게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버지가 "애빌린에 가서 밥이나 먹을까?"라고 툭 던지자, 아내는 남편 기분을 맞춰주려고 "좋아요"라고 합니다. 장모님은 딸이 가자고 하니 "나도 좋다"라고 하고, 남편은 장모님이 원하시니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두가 불행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서로 "나는 사실 가기 싫었다"라고 고백합니다.
회의 시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팀장이 던진 무리한 아이디어에 대해 김 과장이 동의하고, 이 대리도 눈치껏 동의합니다. 결국 아무도 그 아이디어가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으면서, 다 같이 야근하며 그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침묵은 동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사고 정지일 수 있습니다.
3. 침묵을 깨는 열쇠, 심리적 안전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성원들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요? 하버드대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그 해답으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제시합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내 의견이 무시당하거나, 내가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제가 멍청해 보일 수도 있는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글(Google)이 2년간 최고의 성과를 낸 팀들의 공통점을 분석한 결과, 가장 중요한 요인은 팀원의 IQ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이 심리적 안전감이었습니다. 내가 엉뚱한 의견을 내도 팀장이 비웃지 않고 "재미있는 생각이네, 더 구체적으로 말해볼래?"라고 받아줄 때, 굳게 닫힌 입은 열리게 됩니다.
요약 및 결론
회의실의 침묵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피하려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결과입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애빌린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도 비난받지 않는다는 심리적 안전감을 조성해야 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리더의 반응이 침묵의 두께를 결정한다
회의 시간에 "자유롭게 말해봐"라고 해놓고, 막상 누군가 용기 내어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리더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면박을 준 적은 없나요? 그 찰나의 순간이 조직의 문화를 결정합니다.
침묵은 구성원들이 리더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시위이자 방어입니다. 입을 닫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소통을 원한다면 나쁜 소식을 가져온 전령을 죽이지 마십시오. 오히려 반대 의견을 낸 사람에게 "그 부분을 짚어줘서 고마워"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하십시오. 반대 의견이 리스크가 아니라 기여로 인정받을 때, 회의실은 비로소 죽은 공간에서 살아있는 토론장으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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