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대리, 이번 신규 프로젝트 아이디어 좀 내봐." "글쎄요, 팀장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분명 3년 전 면접장에서는 "회사를 뒤집어 놓겠다"며 포부를 밝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 없는 눈빛으로 모니터만 바라보며, 새로운 일을 맡기려 하면 "해봤자 안 돼요"라며 고개부터 젓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며 '매너리즘에 빠졌다'거나 '열정이 식었다'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이것이 개인의 나태함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학습된 슬픈 결과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우리를 무기력한 코끼리로 만드는 심리적 족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에 대해 이야기해 봅니다.
1.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의지를 꺾는다
1967년, 마틴 셀리그만은 개를 대상으로 잔인하지만 중요한 실험을 했습니다. 개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A그룹: 코로 버튼을 누르면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있는 환경. B그룹: 몸부림을 쳐도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없는 환경(통제 불가능). C그룹: 전기 충격을 주지 않음.
그다음, 세 그룹의 개를 낮은 울타리만 넘으면 전기를 피할 수 있는 상자에 넣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A그룹과 C그룹의 개들은 금방 울타리를 넘어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B그룹의 개들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낑낑대며 전기를 그대로 맞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경험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학습된 무기력입니다.
2. 거절당한 기획서가 쌓일 때 좀비가 태어난다
직장은 거대한 실험실과 같습니다. 신입사원이 의욕적으로 기획안을 가져갑니다. "이건 이래서 안 돼." 다시 수정해서 가져갑니다. "저건 저래서 안 돼."
아무리 노력해도 상사의 변덕이나 회사의 경직된 시스템 때문에 결과가 바뀌지 않는 경험(통제 불가능성)을 10번쯤 하고 나면, 신입사원의 뇌는 B그룹의 개처럼 변합니다.
"아, 여기는 내가 뭘 해도 안 되는 곳이구나. 그냥 시키는 거나 하자."
이때부터 그는 입을 닫고, 생각하기를 멈춥니다. 회사가 위기라고 해도 "어차피 망할 거"라고 냉소하고, 새로운 제안이 와도 "해봤자 윗선에서 까일 텐데 뭐 하러 힘을 빼?"라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학습해 버린 똑똑한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3. 무기력을 깨는 백신, 통제감 회복
다행히 무기력도 치료가 가능합니다. 셀리그만 교수는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통제감(Sense of Control)의 회복을 제시했습니다.
무기력한 개를 강제로 끌어당겨서 울타리를 넘게 해주었더니, "아, 내가 움직이면 고통을 피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학습하고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내가 100%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성공 경험(Small Wins)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효능감을 맛보는 순간, 뇌는 다시 도전할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요약 및 결론
학습된 무기력은 반복적인 실패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겪으며,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믿고 포기해 버리는 심리 상태입니다. 직장 내의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와 잦은 거절 경험은 구성원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제 가능한 작은 목표부터 달성하며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 Curiosity's Insight: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된 나를 발견하다
# "어차피 안 바뀔 텐데요" 입버릇의 시작
저도 한때는 회사에서 가장 시니컬한 대리였습니다. 회의 시간마다 팔짱을 끼고 앉아서, 누가 무슨 아이디어를 내든 속으로 비웃었죠. "풉, 저거 상무님이 싫어할 텐데.", "예산 핑계 대고 안 해주겠지."
제가 처음부터 삐딱했던 건 아닙니다. 입사 2년 차 때, 정말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에 밤을 새워가며 업무 프로세스 개선안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비효율적인 보고 체계 때문에 다들 고생하고 있었거든요. 30장짜리 보고서를 들고 팀장님을 찾아갔습니다.
팀장님은 표지조차 열어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김 대리, 일 안 많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해." 그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졌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돌아오는 건 "나대지 마라"는 무언의 압박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발목에 밧줄이 묶여 자란 코끼리는, 나중에 덩치가 커져서 밧줄을 끊을 힘이 생겨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하죠. "나는 안 돼"라는 믿음이 밧줄보다 더 단단하게 저를 묶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월급만큼만 일하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전형적인 '월급 루팡'이 되었습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시체 같았으니까요.
# 책상 정리가 내 인생을 구했다
저를 그 늪에서 꺼내준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습니다. 어느 날, 출근했는데 책상이 너무 지저분해서 짜증이 확 났습니다. 상사도 싫고, 일도 싫은데 책상까지 나를 괴롭히나 싶었죠.
홧김에 물티슈를 뽑아서 책상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서류를 버리고, 키보드 사이의 먼지를 파내고, 모니터 위치를 바꿨습니다. 30분 뒤, 깨끗해진 책상을 보는데 묘한 쾌감이 느껴졌습니다. "아, 적어도 내 책상 위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구나."
그날 저는 아주 작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회사의 시스템은 내 마음대로 못 바꾸지만, 내 모니터 배경화면은 바꿀 수 있다. 상사의 성격은 못 고치지만, 점심 메뉴는 내가 고를 수 있다.
# 아주 작은 통제권부터 되찾으세요
그날부터 저는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업무 반란이 아니라, 소소한 통제권 반란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남들 다 가는 식당 안 가고 혼자 샌드위치 먹으며 산책하기. 보고서 폰트를 내가 좋아하는 걸로 바꿔서 올려보기(안 혼나더라고요?). 출근길 루틴을 바꿔보기.
신기하게도 사소한 것들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실행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업무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시키니까 한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주어를 '나'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죽어있던 눈빛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무기력하신가요? 회사가 감옥처럼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서랍 정리를 하거나, 바탕화면 아이콘을 정리해 보세요. 상사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당신만의 영토를 만드세요. 그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느끼는 '내가 주인이다'라는 감각. 그게 당신을 다시 뛰게 만들 유일한 불씨입니다. 밧줄은 생각보다 약합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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