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행동 이야기

인사고과 시즌에만 반짝 일하는 이 대리가 S등급 받은 이유(feat. 최신 효과)

by 호기심의 항구 2026. 4. 15.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사내 메신저로 연간 성과 평가 공지가 뜨면, 사무실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집니다. 평소에는 칼퇴근을 사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안 하던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하죠. 오늘은 복잡한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제가 예전 직장에서 직접 겪었던 기막힌 인사고과 시즌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마지막 인상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다소 씁쓸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연간 달력 배경 앞에서 팀장이 커다란 돋보기를 통해 11월에만 반짝 열심히 일하는 직원의 모습만 집중해서 들여다보며 흡족해하는 반면, 상반기에 산더미처럼 높은 성과를 쌓아 올린 직원은 팀장의 시선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어, 직장 내 인사고과 평가 시 발생하는 최신 효과를 표현
이 이미지는 AI 생성 이미지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 상반기의 영웅과 11월의 요정

1) 팀을 먹여 살렸던 상반기의 영웅, 박 과장

제가 예전 직장의 기획팀에 근무할 때의 일이에요. 당시 저희 팀에는 묵묵히 일만 하는 실력파 박 과장님이 있었습니다. 박 과장님은 그해 3월과 4월, 회사 전체의 핵심 목표였던 대형 신규 프로젝트를 밤낮없이 매달려 성공적으로 론칭시켰습니다. 팀의 상반기 목표 달성률을 무려 200%로 끌어올린 엄청난 성과였죠. 프로젝트가 안정화된 하반기부터는 특별히 눈에 띄는 사고를 치지도, 그렇다고 엄청난 야근을 하지도 않으며 평범하게 루틴 한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2) 11월에만 강림하는 열정의 화신, 이 대리

반면 같은 팀의 이 대리는 1월부터 9월까지 그야말로 투명 인간에 가까웠습니다. 회의 시간엔 늘 딴청을 피웠고, 주어진 업무도 기한을 겨우 맞추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찬 바람이 부는 10월 말부터 이 대리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 팀장님 책상을 닦아놓는 것은 기본이고, 남들이 다 꺼리는 연말 부서 워크숍 준비 TF장 자리를 자원하더군요. 11월 내내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팀장님이 지나갈 때마다 큰 소리로 업무 통화를 하고, 주말에도 이메일을 보내며 엄청난 열정을 과시했습니다.

3) 허탈했던 12월의 평가 결과

그리고 대망의 12월 인사고과 결과 발표 날. 팀 내 최고 등급인 S등급을 가져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반기 내내 팀을 하드캐리 했던 박 과장님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11월 한 달 동안 사무실의 요정으로 활약했던 이 대리였어요! 그날 팀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누구나 인정했던 상반기의 에이스 박 과장님은 깊은 회의감에 빠져 이듬해 봄에 결국 퇴사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참 씁쓸한 퇴장이었어요.

2. 최신 효과: 뇌는 왜 마지막 기억만 편애할까?

1) 1년 치 성과를 한 달의 기억으로 덮어쓰기

팀장님의 뇌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평가 면담 때 팀장님의 피드백은 이랬습니다. 이 대리가 요즘 들어 팀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하고 야근도 잦은데 그 열정을 높게 샀고, 반면에 박 과장은 하반기 들어서 좀 안주하는 것 같아 아쉽다는 것이었어요. 8개월 전 박 과장이 며칠 밤을 새우며 만들었던 훌륭한 성과보다, 어제 저녁 10시에 이 대리가 땀 흘리며 복사기를 돌리던 모습이 팀장님의 머릿속을 완벽하게 지배해 버린 것입니다.

2) 최신 효과의 덫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 주범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최신 효과(Recency Effect)입니다. 인간의 뇌는 한정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과거의 오래된 정보는 흐릿하게 지우고 가장 최근에 입력된 강렬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체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억의 효율성을 핑계로 아주 치명적인 판단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죠.

3) 일상에서도 반복되는 기억의 꼼수

이러한 뇌의 꼼수는 직장 밖에서도 쉴 새 없이 일어납니다. 2시간 내내 지루했던 영화가 마지막 5분의 반전 덕분에 명작으로 기억되거나, 코스 요리가 다 맛있었어도 마지막 디저트가 입맛에 안 맞으면 그 식당 전체를 별로였다고 평가해 버리는 식이에요. 결국 우리는 전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의 인상에 크게 휘둘리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3. 억울한 에이스가 되지 않기 위한 실전 팁

1) 리더의 필수 방어책: 상시 기록

리더는 자신의 기억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해요. 1년 치 평가를 12월에 몰아서 하려다 보면 무조건 11월의 이 대리에게 속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분기별로, 혹은 핵심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팀원들의 성과와 기여도를 짤막하게라도 반드시 텍스트로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연말에 그 팩트 시트를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최신 효과의 왜곡을 훌륭하게 방어할 수 있어요.

2) 실무자의 생존법: 나의 상반기를 적극적으로 소환하라

당신이 박 과장처럼 상반기에 훌륭한 성과를 냈다면, 연말에 팀장님이 알아서 기억해 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고과 면담 시즌이 다가오면, 본인이 1년 동안 해온 핵심 성과들을 수치화하여 1페이지짜리 요약본으로 만들어 들어가세요. 팀장님, 제가 지난 4월에 론칭했던 프로젝트가 연말까지 이 정도의 누적 매출을 달성했습니다라고 명확하게 어필하여, 과거의 찬란했던 성과를 팀장님의 뇌 속에 가장 최신 정보로 다시 업데이트해 주는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3) 결론: 공정한 평가가 조직의 생명줄이다

조직에서 인사고과는 단순히 연봉을 나누는 기준을 넘어, 직원들의 동기부여와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시그널이에요. 반짝 열심히 하는 척하는 벼락치기가 통하는 조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진짜 인재들은 허탈감을 느끼고 떠나게 됩니다. 최신 효과라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오류를 인정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스템을 갖출 때 조직은 진정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